2015년 7월 14일 12시 46분

팀 정보: 유벤투스

리그 : 세리에 A

등번호 : No.10 

대표 선수: 오마르 시보리, 미셸 플라티니, 로베르토 바죠,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14/15시즌이 끝나고 카를로스 테베즈가 고향팀인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면서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10번은 공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12/13시즌에 공석이 된 후로 2년만에 다시 빈자리가 됐다. 테베즈가 등번호 10번을 달기 전에는 주장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달았던 번호고, 그 이전에는 로베르토 바죠가, 더 넘어가면 미셸 플라티니가 달았던 번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 처럼 유벤투스의 10번 역시 영구 결번이 아닌 에이스 선수들이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 상징적인 등번호 10번의 원조격인 선수는 30년대 유벤투스의 세리에 5연패를 주도한 지오반니 페라리란 선수다. 당시 등번호 시스템이 도입 되진 않았지만 주세페 메아짜가 대표팀에서 10번을 달았던 것을 보면 페라리는 소속팀에서는 10번을 달았다고 예상 된다. 


그리고 등번호가 최초로 도입된 시즌 유벤투스의 10번은 프란체스코 카포카살레라는 선수였다. 이 선수가 등번호 시스템이 도입된 시즌 최초의 10번 이었고, 약 두시즌간 이 10번 저지를 입고 유벤투스에서 뛰었다. 이 선수를 시작으로 욘 한센이라는 덴마크 전설이 유벤투스의 10번저지를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유벤투스의 등번호 10번을 달고 6시즌 동안 유벤투스 소속으로 뛰면서 장기간 등번호 10번을 달았던 최초의 선수이다. 


타 팀들의 에이스 등번호인 10번은 유벤투스에게도 에이스들의 등번호지만 30년대부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계보가 끊어지지 않은 등번호다. 이러한 상징적인 등번호를 11/12시즌이 끝나고 델피에로를 위해 영구결번을 시킬려 했지만 델피에로 본인이 거부했고, 그 계보는 카를로스 테베즈까지 이어졌다. 이제 공석이 될 등번호 10번, 유벤투스는 그 주인을 다시 기다린다. 





유벤투스의 10번은 천재만이 입어야한다. 

안드레아 아넬리 회장이 투토스프르트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페노메논', 천재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가 어울리는 선수들만이 유벤투스의 10번저지를 입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델피에로 역시 호나우두에 대한 유럽의 대답, ll 페노메논(진정한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면서 유벤투스의 10번저지를 입었다. 카를로스 테베즈가 페노메논 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지난 2년동안 테베즈가 유벤투스에서 보여준 활약은 10번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12/13시즌 델피에로가 떠난 후 10번자리는 공석이었고, 아이러니하게 유벤투스는 공격수의 득점력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었다. 등번호 10번자리가 공석이 됐던 시즌은 이번 시즌을 포함해 단 4시즌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자리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유벤투스의 에이스가 없다는 뜻이고 득점을 책임져줄 공격수가 없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이야기다. 


등번호 10번을 오래 달았던 선수가 있을 때 유벤투스는 전성기를 이룩했고, 슬럼프가 없었다. 위대한 등번호 10번, 시보리, 플라티니, 바죠, 델피에로 그리고 테베즈에 이은 10번 후계자를 너무 급하게, 너무 여유롭게 찾아서는 안된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면서 등번호 10번의 어울리는 선수가 유벤투스에 입단 하게 될 때 유벤투스는 또 한번 유럽을 호령할 것이다. 





No.10 전설의 시작, 욘 한센과 오마르 시보리

aGrha17.png(욘 한센, 오마르 시보리)

1934/35 시즌 세리에 5연패 이후 49/50시즌까지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물론 중간중간 2차 세계대전 같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못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등번호 10번을 달고 뛰는 에이스가 없었기 때문에 리그 우승을 못했다는 점도 있다. 이러한 암흑기에 등장 한 선수가 바로 욘 한센이다. 덴마크 국가대표 선수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이탈리아를 침몰 시켰던 욘 한센은 48/49시즌 부터 유벤투스로 합류했고, 등번호 10번을 달았다. 


욘 한센은 1948/49시즌 부터 53/54 시즌까지 187경기 124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1949/50시즌에는 세리에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다. 유벤투스에서 한센의 첫시즌은 24경기 15골로 준수했다. 적응문제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한센 이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친것은 49/50시즌 부터였다. 


유벤투스의 감독은 욘 한센을 위해 코치를 제시 카버에서 영국인 윌리엄 머스로 대체했고, 훈련을 덜 엄격하고 훈련 일정을 피지컬 훈련으로만 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1948년 올림픽을 함께 뛰면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동료였던 덴마크 국가대표  칼 에이지 프레스트를 유벤투스에 데려 온다. 프레스트의 포지션은 왼쪽 윙으로 번뜩이는 드리블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드리블로 상대 진영에서 수비진을 휘젓고 다니던 선수였고, 한센의 머리를 노리는 크로스는 매우 정확했다. 한센은 프레스트와 함께 1949/50시즌 37경기 28골을 기록했다. 한센과 프레스트의 활약이 있었지만 유벤투스는 아쉽게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센과 프레스트 콤비플레이는 다음시즌을 더욱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1950년에는 한센과 프레스트에 이은 또 다른 덴마크 선수가 입단하게 된다. 1948년 올림픽에서 덴마크 대표팀 주장이자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의 라이벌이었던 아탈란타소속이었던 칼 에이지 한센이었다. 이 3명의 훌륭한 덴마크 선수들은 뛰어난 수준을 만들어냈고, 욘 한센은 이들과 눈만 마주쳐도 그들의 기술을 모두 보여주었다. 한센은 중요한 순간에 항상 득점을 성공시켜서 유벤투스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렇게 50/51시즌 이 덴마크 트리오들과 함께 유벤투스는 34/35시즌 이후 약 16년만에 스쿠데토를 따낸다.


한센은 세리에 A에서 빠른 축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 수비수들의 마크를 순식간에 벗겨냈고 골 냄새를 잘 맡으며 위치선정이 아주 뛰어났었다. 이러한 능력으로 50/51 시즌 스쿠데토에 이어 51/52시즌에도 스쿠데토 2연패를 달성했고, 한센은 세리에 A에서만 30골을 집어넣으며 득점왕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이후로도 유벤투스에서 뛰면서 총 6시즌을 뛴 한센은 187경기에서 124골을 기록하면서 유벤투스의 No.10 전설을 써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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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2 스쿠데토, 1961년 발롱도르)

욘 한센이 53/54 시즌이 끝나고 유벤투스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 유벤투스의 10번은 없었고 유벤투스는 슬럼프를 겪었다. 그렇게 극심한 부진을 겪었던 유벤투스는 57/58시즌 본격적인 영입을 감행했고, 영입된 선수들은 우리가 잘아는 존 찰스와 오마르 시보리 였다. 존 찰스와 오마르 시보리는 영혼의 투톱을 결성하면서 유벤투스 최초의 영혼의 투톱을 결성했고, 유벤투스의 자랑거리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와 함께 환상적인 경기를 선보인다.


덴마크 트리오 욘 한센, 칼 프레스트, 칼 한센이 유벤투스의 세리에 2연패를 달성시켰다면 새로운 트리오 찰스, 시보리, 보니페르티는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10회 우승을 달성시켰고, 또 한번의 유벤투스 전성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욘 한센의 뒤를 이은 No. 10 은 오마르 시보리였다. 


57/58시즌 부터 64/65시즌까지 총 215경기 135골을 기록한 오마르 시보리는 유벤투스를 거쳐간 몇 안되는 아르헨티노 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시보리의 플레이를 대담하고 화려하다고 묘사했다. 그는 환상적인 드리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 선수의 다리사이로 공을 빼내는 넛 메그를 주로 사용하면서 수비진을 무너뜨렸다. 왼발 선수였던 시보리는 상대적으로 짧은 키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머리로도 많은 슈팅을 시도했다.


시보리는 존 찰스와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와 함께 환상적인 경기력을 펼쳤고,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국가, 반항적인 성격 등으로 인해 디에고 마라도나와 비교 됐고, 미디어에서는 60년대 마라도나라고 이야기 했다. 시보리는 유벤투스 동료들과 함께 59/60 스쿠데토와 60/61시즌 스쿠데토 2연패를 기록했고, 58/59시즌과 59/60시즌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기록했다. 탁월한 득점력과 이러한 우승트로피 들을 획득한 시보리는 1961년 발롱도르를 획득하면서 이탈리아 클럽 소속 최초로 발롱도르 수상자를 배출한다.


또한 유벤투스가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이긴 적이 단 두번 밖에 없는데, 그 첫번째 패배를 안 긴 선수가 바로 오마르 시보리 였고 시보리의 골로 유벤투스는 베르나베우에서 1대0 으로 승리했다. 마법의 트리오라고 불리는 존 찰스, 오마르 시보리,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는 찰스가 리즈 유나이티드로 다시 복귀하면서 깨지게 됐다. 시보리는 2011년까지 유벤투스 최다 득점자 5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유벤투스 영혼의 투톱, 델피에로와 트레제게가 460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오마르 시보리와 존 찰스가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시보리는 2004년 FIFA 선정 100인에 들기도 했다.





유벤투스의 전성기, 파비오 카펠로와 로미오 베네티

ULuQuEq.png(파비오 카펠로, 로미오 베네티)

50년대 초반 덴마크 트리오,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 마법의 트리오가 유벤투스를 이끌었고, 당시의 10번은 공격수 였던 욘 한센과 오마르 시보리였다. 하지만 10번 져지를 입은 것은 공격수만이 아니었는데, 70년대로 넘어가면 유벤투스의 10번은 미드필더 였다. 유벤투스는 30년대 5연패 이후 새로운 전성시대는 70년대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였다. 트라파토니의 유베 역시 이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 유벤투스의 10번은 우리가 명감독으로 잘 알고있는 파비오 카펠로와 트라파토니 유베 시기의 중원의 핵심이었던 로미오 베네티였다.


먼저 파비오 카펠로는 70/71시즌부터 유벤투스에 합류했다. 그리고 유벤투스의 감독이었던 Čestmír Vycpálek에 의해 핵심 선수로 발돋움 하게 됐고, 1971년 인터 시티 페어 컵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 팀 전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카펠로와 함께 1971/72시즌과 72/73시즌, 74/75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1973년 유로피언 컵 결승에 올라섰지만 아약스의 토탈축구에 의해 1대0으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에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AC 밀란과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면서 두번의 결승전에서 두번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74/75시즌 UEFA 컵 준결승전에 진출을 했는데 상대적으로 약팀이라 평가받았던 네덜란드 팀 트벤테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카펠로는 76년에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전력외로 평가됐고, 당시 밀란 소속이었던 로미오 베네티와 1m 리라와 함께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트레이드된 로미오 베네티는 트라파토니 유베의 핵심전력으로 자리잡게 됐고, 카펠로가 떠나면서 비어있던 10번은 베네티가 입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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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2 스쿠데토 멤버, 76/77 UEFA 컵 우승)

76/77시즌부터 유벤투스의 일원으로 합류한 로미오 베네티는 수비형 미드필더 였다. 70년대 이탈리아 카테나치오 전술을 집대성 하는데 일조 했던 선수로 알려진 이 선수는 수비형 미드필더 였지만 높은 득점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세페 푸리노, 프랑코 카우시오, 마르코 타르델리와 함께 강력한 중원을 형성했고, 76/77 UEFA 컵 우승을 달성한다. 


카펠로와 베네티 모두 욘 한센이나 오마르 시보리처럼 많은 득점을 뽑아내던 선수는 아니었지만 두 선수 모두 전술의 핵심이었고, 유벤투스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들의 활약도는 유벤투스의 10번 저지를 입기에는 충분했고, 많은 세리에 우승과 유럽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들이 모두 떠난 후 두명의 선수가 10번 저지를 입었었지만 별다른 임팩트를 보여주진 못했고, 그 이후로 한 프랑스 선수가 유벤투스로 입단을 하는데 이 선수는 또 하나의 전설을 써내려 갔다. 






"Le Roi", 미셸 플라티니

UM6Pyia.png(왕 미셸 플라티니)

70년대 세리에를 정복한 유벤투스는 이제 눈을 유럽대회로 돌렸다. 아직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던 유벤투스는 계속해서 우승을 도전했지만 73년 아약스에게 패배한 이후 결승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76/77시즌 UEFA 컵을 우승하면서 유럽대회 정복의 서막을 알린 유벤투스는 80년대로 넘어가면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고, 그 중 한명이 바로 미셸 플라티니 였다. 


82/83시즌 유벤투스에 합류하게 된 미셸 플라티니는 오마르 시보리 이후 가장 10번다운 선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플라티니의 첫시즌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의 주역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던 팀인데다가 이탈리아 축구를 어려워 했고, 이러한 부진은 미디어의 공격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겨울에 이탈리아 무대를 떠난 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기위해 플라티니와 팀 동료 즈브그니엑 보니에크는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전술 교체를 요청했고, 플라티니는 후반기부터 자신의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함부르크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준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플라티니는 전반기에 받았던 비난을 후반기에 활약을 펼치면서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플라티니는 1984년 부터 1986년까지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우승, 1984년 컵 위너스컵 우승, 1985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1985년 인터 콘티넨탈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82/83, 83/84, 84/85 시즌 3회 연속으로 세리에 득점왕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1984 년과 1985 년에 세계 축구 매거진에 의해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플라티니는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면서 선수들에게 킬패스를 뿌리면서 어시스트를 기록하거나 본인이 직접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시모 보니니, 마르코 타르델리가 후방에서 받쳐주고 플라티니가 전방에서 지휘했던 80년대의 유벤투스는 최강의 팀이었다. 이러한 활약덕분에 플라티니는 83, 84, 85년 3회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80년대 나폴리를 대표했던 마라도나의 라이벌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플라티니는 공격형 미드필더 였지만 공격수에 뒤지지 않는 득점력과 프리킥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선수였다.


헤이젤 참사로 잘 알려진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이날은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날을 기념하는 대신 헤이젤 참사를 기념하는 날로 가려졌고, 39명이 사망하고 600여명이 부상을 당하게 됐다. 즈보그니엑 보니에크가 얻어낸 반칙으로 플라티니가 페널티킥을 찼고, 그 골이 결승골이 되면서 유벤투스는 1대0 으로 승리했다. 유벤투스가 승리하게 됐지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플라티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에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승리했지만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유벤투스 역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지만 기쁨과 동시에 비극도 있었던 시즌이었다. 


어찌됐든 84/85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UEFA 주관 최초로 모든 대회를 우승한 팀이 됐고, 후에 트라파토니는 퍼거슨 다음으로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게 된다. 프랑스 국가대표의 주장이기도 했던 플라티니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프랑스어로 왕인 "Le Roi" 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그리고 2011년 유벤투스가 새 홈구장 개최를 맞추면서 레전드 선수 50명을 뽑아 명예의 거리로 선정했는데 그 50명중 13번째로 미셸 플라티니가 뽑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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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5 챔피언스리그 우승, 발롱도르)

플라티니는 국가대표에서도 에이스 였지만 월드컵 우승하곤 연이 없었다. 78년 월드컵에선 조별예선 탈락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티니는 프랑스 국가대표 주장직을 맡으며 82년 월드컵에 참가했고, 그의 등번호는 유벤투스에서 달았던 번호와 마찬가지로 10번 저지를 입었다. 플라티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프리킥으로 1982년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한 중요한 경기였던 81년11월 18일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온 프랑스는 우승후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들은 준결승전까지 진출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비야에서 프랑스는 서독을 만나게 된다. 이 경기에서 독일 골키퍼 슈마허와 프랑스 선수인 패드릭 바티스톤과 페널티 박스에서 충돌했는데 심판은 페널티킥을 불지 않았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격하게 항의 했었다. 연장전이 진행 된 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자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플라티니는 첫번째 키커로 나서면서 페널티킥을 성공했지만 서독이 5대4로 이기면서 결승전에 진출한다. 3대3무승부로 끝나고 승부차기 끝에 서독이 올라간 이경기는 재미있게도 플라티니가 자신의 커리어 역사상 가장 기억남는 경기라고 이야기 했다.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에서의 상처를 1984년 유로에서 만회하기로 결심했다. 자국에서 열렸던 유로에서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주장을 맡아서 대표팀을 이끌었고, 이 대회에서만 플라티니는 프랑스 대표팀이 기록한 14골중 9골을 기록하면서 자국이 원했던 유로 우승을 선사했다. 플라티니 원맨쇼였던 이 대회에서 플라티니는 82년 월드컵의 4강 탈락을 그나마 치유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타 프랑스 대표팀은 86년 월드컵에선 우승을 노리기로 했다. 


물론 월드컵에 출전하기 전 플라티니는 사타구니 통증으로 고생을 했었지만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거의 다 회복이 됐고, 출전할 수 있는 몸상태가 되었다. 물론 정상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티니는 중요한 골을 두골을 기록했는데, 첫번째 골은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대결에서 2대0 승리를 거두는 데에 기록했던 골이고, 두번째 골은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였다. 브라질의 카레카가 득점을 하면서 브라질이 리드를 하게 됐지만 플라티니가 자신의 31번째 생일날 통산 41골을 동점골로 기록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프랑스가 4대3으로 승리한다. 이 골은 플라티니의 국가대표 커리어 마지막 골이었고, 과달라하라에서 서독에게 또 한번 패배를 당하면서 프랑스는 3위를 기록하게 된다. 여기서 플라티니는 82년과 86년 3위 결정전에서 모두 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플라티니는 은퇴를 발표하기 몇 주전 1987년 4월 29일 유럽선수권 예선 아이슬란드와의 경기에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다. 1976년부터 1987년까지 72경기를 뛰면서 41골을 기록했고, 이 득점 기록은 티에리 앙리가 유로 2008 예선이었던 2007년 10월 17일날 42골과 43골을 기록하면서 프랑스 최다 득점 기록은 티에리 앙리가 갖게 됐다. 










판타시스타, 로베르토 바죠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tgdjMGO.png(로베르토 바죠,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50년대 초반 욘 한센,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 오마르 시보리, 70년대 카펠로와 베네티, 80년대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9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로베르토 바죠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등번호 10번 져지를 입게 된다. 트라파토니가 유벤투스를 떠난 후 리그 순위는 좋지 못했고, 그로 인해 91/92시즌 유벤투스는 트라파토니를 다시 데려온다. 그리고 바죠는 트라파토니와 함께 뛰게 된다.


바죠는 90/91시즌부터 유벤투스에 합류했고, 94/95시즌까지 뛰면서 총 141경기 78골을 기록한다. 현재 이탈리아 축구협회 기술부 총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기술적인 재능, 창조적인 플레이 메이킹 능력과 예리한 프리킥등으로 세트피스 전문가인 로베르토 바죠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간주되고 있다. 


바죠는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도 뛰어난 선수였다. 56경기 27골을 기록했고, 1990년 월드컵에서는 2골을 기록하며 아주리 군단의 3위 달성에 일조를했고, 94년 월드컵에서는 5골을 기록하면서 아주리 군단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물론 결승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하면서(어짜피 바죠가 성공해도 브라질선수가 성공하면 게임끝)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또 1998년 월드컵에선 프랑스에게 패배하기전까지 2골을 기록했고, 3번의 대회에서 총 9골을 기록한 바죠는 파울로 로시,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함께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최다 득점자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바죠의 첫시즌인 90/91시즌 유벤투스는 유럽대회에 나갈 수 있는 순위 밖인 7위를 기록하면서 다음시즌 유럽대회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됐지만 루이지 마이프레디에 의해 처진 공격수로 뛴 바죠는 14골 12어시를 기록하면서 준수하게 활약을했다. 유벤투스는 유로피언컵 준결승에도 진출했고, 여기서 바죠는 9골을 기록을 하면서 유벤투스를 이끌었지만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 드림팀에 의해 탈락하고 만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우승팀 로마에 의해 8강전에서 탈락했고, 바죠는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했다. 또한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나폴리에게 패배를 했는데 바죠가 성공시킨 프리킥 골이 유벤투스의 유일한 골이었다. 90년 10월 21일 라치오와 0대0 무승부를 기록한 경기에 출전하면서 바죠는 자신의 세리에 100번째 경기를 뛰게 됐고, 90/91시즌 바죠는 총 27골을 기록했다.


두번째 시즌에는 새로운 감독인 트라파토니와 만나게 됐고, 바죠는 18골을 8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반바스텐을 밀어내고 세리에 득점왕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바죠는 코파이탈리아 결승 1차전 파르마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물론 유벤투스는 카펠로의 AC밀란에 의해 리그 2위를 달성했다. 그 와중에 바죠는 바리와의 경기에서 3주 부상을 당했었다. 또 바죠는 트라파토니와 의견차이가 있었고, 더 많은 롤을 부여받게 됐다. 


세번쨰 시즌인 92/93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임명됐고, UEFA컵 결승전에서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두골을 기록하면서 도합 6대1로 승리하면서 유벤투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고, 바죠의 커리어에서 첫 유럽대회 트로피를 들게됐다. UEFA컵 결승전에 오르는 과정에서 바죠는 4강 1차전 PSG와의 홈경기에서 두골을 기록하며 2대1 승리를 이끌었고, 이 득점이 4강전 유벤투스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또한 바죠는 리그에서 챔피언 AC밀란과의 경기에서 팬들에게 기억될 골을 기록하면서 3대1 승리를 거두었지만 유벤투스는 리그 4위를 기록한다. 이시즌 바죠는 21골 6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로써도 5골을 기록하면서 개인 커리어 최초로 모든대회 30골 이상을 기록했다.


또한 바죠는 1993년에만 세리에 A에서 23골, 코파이탈리아 3골, 유럽대회 8골,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 5골을 기록하면서 이 해에만 39골을 기록했고, 이러한 뛰어난 활약 덕분에 전 유럽 축구선수들중에 150점 만점에서 142점을 받으면서 피파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발롱도르 수상과 세계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다. 


93/94시즌에는 17골과 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시즌에 바죠는 젊은 델피에로와 함께 뛰면서 주로 새컨 스트라이커로 종종 뛰었고, 1993년 10월 31일 제노아와의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면서 4대0 승리를 이끌었고, 여기서 자신의 100번째 골을 기록한다. 93년 12월 5일에 나폴리와의 1대0으로 승리한 이 경기에서도 출전하면서 세리에 200번째 출전을 기록한다. 부상으로 일찍 시즌을 마감한 이 시즌에 94년 3월에 열린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2위를 기록했고 피파 올해의 선수상 3위를 기록했다. 


94/95시즌에는 트라파토니의 뒤를 이어 마르첼로 리피가 감독직에 오르는데 리피는4-3-3 전술을 사용하면서 바죠의 의존도를 줄이고 더 조직력 있는 팀을 만들기를 원했다. 설상 가상으로 바죠는 시즌의 대부분을 부상으로 날리면서 94년 11월 27일 파도바와의 경기에서 프리킥 득점 이후 5달동안 경기에 뛰지 못했고, 그 빈자리는 델피에로가 메꿨다. 바죠가 복귀한 날은 1995년 3월 8일 코파이탈리아 준결승전 라치오와의 1차전이었다. 바죠는 1995년 3월 12일에 포지아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두번째 골을 기록했고, 라바넬리의 골을 도우며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마르첼로 리피가 오기전까지만 해도 유벤투스는 바죠에 의한 바죠를 위한 팀이었다. 테크닉과 기술은 물론 창조성까지 갖추고 있던 바죠에게 판타시스타라는 수식어는 완벽한 수식어였다. 리피가 오면서 바죠 원맨팀이 아니게 됐지만 90년부터 95년 초까지 보여준 바죠의 플레이는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눈을 정말 즐겁게 해주었다. 물론 아직까지 94년 월드컵에서 실축한 그 장면은 계속 회고되고 있지만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바죠는 신 그 자체였고, 세리에 A로 관심을 갖게 해준 선수였다. 경기를 뒤집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다음 플레이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뜻의 판타시스타, 가장 판타시스타 다운 선수는 로베르토 바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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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발롱도르, 2006년 월드컵)

리피가 바죠 의존도를 지우기 위해 4-3-3 전술을 사용하면서 바죠는 전력외로 평가 받았고, 거기에 부상까지 더해지면서 리피의 플랜에 바죠는 없었다. 그로 인해 95/96시즌 부터 AC밀란으로 이적했고, 그가 달고 있던 등번호 10번은 델피에로가 이어 받았다. 93/94시즌 바죠와 함께 뛰면서 등번호 9번을 입었던 델피에로는 10번 져지를 입게 됐고, 95/96시즌 그해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바죠와 마찬가지로 기술성과 창의성은 물론 프리킥 능력들은 월등했던 델피에로였고, 델피에로 세대에서는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였고, 전문가들과 축구관계자들은 이탈리아 베스트 선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델피에로의 연대기를 쓸려면 족히 몇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제외 하겠다.)


93년에 유벤투스에 입단하여 2012년 떠나기 전까지 705경기에 출장하여 290골을 기록했다. 유벤투스 올타임 레전드중 한명임과 동시에 11시즌 동안 주장직에 있으면서 유벤투스 역대 최장기간 주장기록을 가지고 있는 델피에로는 바죠의 이은 또 한명의 판타시스타라는 수식어를 달았었다. 작은 키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예리한 프리킥등으로 당대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호나우의 라이벌이라고 불렸으며 호나우두가 Phenomenon, 즉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면 델피에로에겐 ll Phenomenon 이라는 진정한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리피와 함께 3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진출은 물론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도 유로 2000 준우승 까지 달성했었다. 하지만 델피에로에게 항상 좋은일만있었던 것은 아닌데, 97/98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레알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이에로에게 태클을 당하면서 아웃됐고, 그 여파로 챔스 준우승은 물론 98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프랑스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했었다. 또 98/99시즌에는 우디네세 전에서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고, 델피에로는 시즌 아웃이 되면서 유벤투스는 98/99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4강전에서 탈락한다. 


이 부상 여파로 델피에로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낼 수 없었고, 경기감각이 제때 돌아오지 못하면서 유로 2000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찬스 두 차례를 놓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벤투스에겐 그래도 중요한 선수였고, 유벤투스 팬들은 델피에로를 옹호했다. 그리고 00년 유로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트레제게가 유벤투스로 입단하면서 델피에로와 투톱을 형성했고, 이 투톱은 존 찰스와 오마르 시보리에 이은 새로운 영혼의 투톱으로 역사를 써내려 갔다. 


델피에로에게 부상을 제외하고 슬럼프가 한번 더 있었다. 그것은 04/05 시즌 부터 였는데 리피의 후임으로 온 카펠로 감독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중용하면서 델피에로를 자주 출전시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델피에로는 많은 시간을 벤치에서 보냈다. 하지만 당시 이브라히모비치의 경기력은 좋지 못했고, 종종 교체출전을한 델피에로의 활약도가 더 높았기 때문에 카펠로는 유벤투스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펠로는 이브라히모비치를 중용했고, 04/05시즌과 05/06시즌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탈락했다. 


그렇게 2006년이 다가왔고, 월드컵이 다가왔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필드골을 단 한골도 먹히지 않는 극강 수비를 보여주면서 4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델피에로는 기쁘지만은 않았다. 칼치오폴리 파동으로 인해 유벤투스는 세리에 B로 강등 됐기 때문이다. 많은 선수들이 유벤투스를 떠났지만 델피에로는 남았고, 부폰, 네드베드, 카모라네시, 트레제게 등과 함께 1년만에 승격을 달성했다. 승격후 리그 3위는 물론 다음 시즌 리그 준우승을 달성하면서 부활을 알리나 싶었지만 09/10시즌과 10/11시즌 연속으로 7위를 찍으면서 암흑기를 겪었다.


이 암흑기 도중 밀란과의 이적설이 나돌기도 했었고, 실제로 갈리아니가 언제나 밀란은 델피에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적설의 불을 지피기도했다. 물론 델피에로가 떠나지 않으면서 이적설은 잠잠해졌다. 암흑기와 이적설로 골머리를 앓다가 11/12시즌이 다가왔고, 자신의 팀 동료였던 안토니오 콘테가 유벤투스 감독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콘테와 함께 델피에로는 유벤투스를 무패우승으로 이끌었다. 주전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라치오 전에서 골을 터뜨리는 등 중요한 경기에서 중요한 골을 터뜨리면서 다시한번 세리에 왕좌를 되찾게 했다. 그리고 델피에로는 호주 시드니로 이적하면서 가장 위대했던 10번의 주인은 유벤투스를 떠나게 된다. 


유벤투스의 가장 위대한 주장, 위대한 10번이었던 델피에로는 17시즌 동안 등번호 10번을 달았었다. 유벤투스의 10번중 가장 최장기간동안 입고있었고, 그 누구도 그가 10번이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활약들 때문에 유벤투스는 10번을 영구결번 시키려 했지만 델피에로 본인이 10번의 계보는 이어져야 한다며 거절을 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무패우승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선사한 델피에로는 현재 스카이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유벤투스 회장인 아넬리가 델피에로를 보드진으로 부르려 한다는 소식도 있다. 


바죠와 델피에로의 임팩트 덕분에 유벤투스의 10번은 이탈리아의 10번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물론 오마르 시보리나 파비오 카펠로 등이 유벤투스에서 10번 저지를 입고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도 10번 저지를 입었었지만 베네티가 유벤투스의 10번으로 활동할때에 이탈리아 국가대표 10번은 밀란의 골든보이 지안니 리베라 였다. 애초부터 바죠와 델피에로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다보니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12/13시즌 델피에로의 빈자리를 채워줄 공격수를 찾지 못하면서 공석이 됐었고, 13/14시즌 또 한명의 10번 선수를 영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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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의 가장 대표적인 No.10이었던 두 인물)




'칼리토스' 카를로스 테베즈, 그리고 공석

델피에로의 뒤를 이어 유벤투스의 10번저지를 입게 된 것은 바로 카를로스 테베즈 였다. 하지만 본래 테베즈는 10번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시절 내내 입었던 등번호 32번을 원했었지만 당시 32번은 마트리였다. (만약 마트리가 일찍 밀란에 갔다면 유벤투스의 10번은 계속 공석이었을 수도...)그렇기 때문에 유벤투스는 테베즈에게 10번을 주었고, 테베즈는 그 등번호를 받았다. 


물론 테베즈가 10번을 입는 다는 것에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사고뭉치로 만치니와 많은 불화를 일으켰던 선수에게 등번호 10번은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의견이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걱정은 시즌이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됐고, 그 해에 테베즈는 리그 19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14/15시즌 리그 20골과 챔피언스리그 7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달성하는데에 가장 큰 일조를 했다. 향수병때문에 계약기간보다 1년 더 일찍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매우 아쉽지만 애초에 유벤투스 올때부터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예고를 했기 때문에 유벤투스 역시 테베즈를 웃으면서 떠나보냈다. 


두시즌 밖에 뛰지 못했지만 10번을 달고 뛰면서 단기간 보여준 임팩트로는 최고였던 테베즈의 활약이었다. 그렇게 15/16시즌 유벤투스의 등번호 10번 저지를 입고 뛰는 선수는 없게 됐다. 아넬리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한다고 이야기 했다. 10번이 없다는 것은 에이스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4/15시즌 테베즈가 없던 경기에서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테베즈는 유벤투스의 10번에 제격인 선수였다. 


활약 여부에 따라 15/16시즌 예상 10번 선수는 파울로 디발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의 활약이 10번에 걸맞는 활약을 펼쳐야만 가능한 상황이다. 10번의 자리가 없던 당시 공격수의 득점력 부재를 겪으면서 시즌을 치룬 것을 생각해보면 유벤투스의 10번을 최대한 빠르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즌이 바뀔 때마다 바뀌어 서는 안된다. 오랫동안 유벤투스의 10번을 달고 활약할 수 있는 선수, 그러한 선수만이 유벤투스의 10번을 입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델피에로, 테베즈의 뒤를 이을 새로운 10번이 올 때까지 보드진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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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베의심장부폰 Lv.31 / 13,025p
댓글 5 건
항상 델피에로에 대해서는 저평가되는것도 있는것 같고, 고평가되는것도 있는것 같고 광팬인 져도 좀 헷갈리네요 항상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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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유벤투스의 10번. 정말 가슴 뛰는 번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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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플라티니- 바죠 - 델 피에로 - 테베즈 - 삼파전 (바달라 or 베라르디 or 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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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5
개인적으로 나중에 디발라가 달았으면 하네요.
이스코 데려와서 10번 줍시당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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